2024.03.29 (금)

기상청 제공
정학수 전 농림부 차관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학수 전 농림부 차관

“행복한 고창, 미래희망을 만드는 고창”


 정학수 전 차관이 고창발전의 비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고창군수 출사표를 던진 정학수 전 농림부 차관.

 그를 인터뷰하러 가던 도중 취재진은 조류인플루엔자 방역을 실시하고 있는 김제와 정읍의 도로를 거쳐 갔다. 마음이 심란해 짐은 어쩔 수 없었다. 고창으로 들어서는 순간 드넓게 펼쳐진 황토들판을 만났다. 고창땅의 풍요로움을 간직하게 해준 붉은 황토흙들. 그를 만나는 순간, 정 차관이 황토빛을 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고창발전을 위해 가진 꿈은 무엇일까 또한 궁금해 졌다.

 
 ◆고창 수재에서 농림부 차관까지

 정 후보를 만나기 전에 그의 이력을 살펴보았다. 1954년 갑오년 생이다. 6.25 전쟁이 끝나고 태어난 세대여서 전쟁의 폐허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6남2녀로 태어난 정 후보는 그래서 우리 부모세대가 겪었을 대부분의 시련을 겪었다. 그것을 다시 나열하는 것은 사족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

 고창초, 고창중, 고창고를 졸업했다. 그는 가난과 시름하며 공부에 파묻혀 살았다. 성적표에는 ‘수수수수수’가 가득했고, 전교1등을 놓치지 않았다. 재수를 했고, 고려대 법과대학을 입학했다. 재수 시절 겪은 좌절과 고통은 훗날 그가 있게 한 씨앗이 됐다고 술회하고 있다. 미국텍사스A&M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중앙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행정고시에 합격해 농림부 농지과장, 기획예산담당관, 대통령 비서실 행정관, 농촌개발국장을 지내고,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원장을 맡았다. 이후 농림수산식품부 제1차관으로 공직을 마쳤다.

 
 ◆고향은 내가 갚아야 할 은혜의 땅

 -출마동기는 무엇인가.

→지난 31년 동안 농림부에서만 공직생활을 해 왔다. 전국 400만 농어민의 마음과 입장에서 일했다. 그리고 언제나 마음속에는 고향인 ‘고창’을 잊지 못했다. 언젠가는 나를 키워준 고향사람들과 부모, 형제들에게 은혜를 갚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다.

 -2012년도에 귀촌을 감행했다. 실제 고향에 내려와 살아보니 어떤가.

→내가 학교 다닐때는 인구가 18만명이나 되는 큰 군이었다. 지금은 6만으로 줄어들었고, 그것마저 유지하기 힘든 상황에 처했다. 지역상권이 위축돼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무엇보다 65세 이상이 27%나 되는 초고령사회에 들어섰다. 고민이 많다. 그러나 선진국의 농어촌도 비슷한 상황을 겪다가 도시민의 유턴으로 공동체가 회복되는 사례가 있어 희망을 가져 본다.

 -‘희망’ 참 좋은 말이다. 고창의 발전 가능성을 보았단 말인가.

→그렇다. 고창은 청정한 자연환경과 많은 문화와 자연유산을 가지고 있다. 지역 주민들도 부지런하고 뭔가 새로운 일에 매달리려는 도전욕구도 강하다. 동학혁명의 출발지도 고창이다. 고창의 미래 희망은 새로운 농어업, 생태관광, 전통문화의 재생 등에서 만들어 질수 있다고 생각한다. 10년 후 고창이 매일 평균 10만명이 머무르는 경제생활권으로 만들어졌으면 하는 것이 나의 꿈이다.

 -농림부에서 31년간 생활했고 농림부 차관을 지냈다. 고창농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가.

→농어업, 관광산업, 문화산업은 일자리 창출효과가 큰 산업이다. 농어업은 단순히 농수산물을 생산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식품가공, 자재생산, 체험관광, 민박 등 전후방으로 연관된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산업이다.

 재능은 있으나 자본이 적은 사람들이 모여 일자리를 만드는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 기업을 많이 만들어 가면 다양한 일자리가 만들어 질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일자리 창출과 귀농.귀촌인력들의 유치를 통해 인구를 8만명으로 늘리고 나머지 체류하는 관광객을 2만명으로 늘리면 10만명의 경제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농림부 시절 가장 기억나는 일은 무엇인가.

→농지개혁법을 제정한 일과 농가부채를 해결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1994년 농지법이 우여곡절 끝에 국회 본회의에 상정 처리됐다. 이로써 농지개혁법이 제정된지 45년 만에 농지에 관한 기본법이 만들어 진 것이다. 그동안 농지법은 서로의 이념과 이해관계의 상충으로 표류해 왔다. 내가 주무과장이 돼 비로소 입법했다는 커다란 성취감과 자부심을 갖게 됐다.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IMF 사태이후 농가경제가 급격히 나빠졌다. 농자재 가격은 오르는데, 농산물 가격은 내려 농가부채가 심각해 졌다. 언론에도 농가부채 탓에 농민들이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었다는 기사가 많이 났다. 2000년 농림부가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농어촌부채특별법을 만들어 16조5천3백억원을 농어가 부채해결을 위해 지원했다. 저리 장기상환 등 농어민의 회생에 최대한 초점을 맞추어 지원했고, 연대보증의 폐해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고창의 서녘으로 해가 넘어갈 즈음 우리의 인터뷰도 끝이 났다. AI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을 농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진다는 그의 말이 심금을 울린다. 아직 정치에 익숙지 않은 순수함 때문이지 정치적 수사보다는 고향에 대한 애정이 먼저 앞서곤 했다.

 좀처럼 속내를 내보이지 않는 주민들 때문에 애간장이 타들어 간다며 너스레를 떠는 정 후보.

 자타가 공인하는 농림부의 기획통으로 인정받고 있는 정 전 차관. 황토밭 고창을 누비고 있는 정 후보의 열정만큼이나 석양이 아름답게 빛났다.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